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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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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시대

인류가 생명 활동을 시작하면서 함께 해 왔던 최면 현상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논리적 검증을 거치기 이전부터 모든 문화권에서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이용돼 왔다. 먼 옛날 고대로부터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제례 의식, 샤먼(shamans)의 질병 치료를 위한 의식 속의 주술(呪術),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종교의식 속에 이미 최면 현상(trance)을 일으키는 최면 기법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문헌이나 그림, 벽화에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잘 나타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의 여신 이시스의 신전에 있는 조각이나 기원전 10세기 그리스의「잠의 사원」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최면 상태로 유도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을 입증 해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는 약 3000여 년 전의「에베르스 파피루스」(Ebers Papyrus;고대 이집트의 의학 문헌)에서 최면으로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였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근대시대

  • 메스머의 동물 자기

근대최면의 창시자이자 ‘최면의 아버지’로 불리는 메스머(Franz Anton Mesmer;1734-1815)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1766년 학위논문에서 ‘천체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를 발표함으로써 임상최면의 과학적 접근이 시작되었는데 우주에는 ‘자기(磁氣)’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체(fluid)의 물리적 힘이 작용하여 인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즉, 자기의 불균형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후 메스머는 자신의 초기 이론을 수정하여 우주유체(cosmic fluid) 라는 것이 무생물체에 저장되었다가 환자에게 옮겨가서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에도 자기가 작용하며, 자신은 자기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최고인 것으로 믿었다.
이때부터 메스머는 자석의 역할을 대신하여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의술로서는 잘 낫지 않던 난치병 환자들이 단기간 내에 치유되는 효과를 올리자 진료소는 문정 성시를 이뤘다. 이것이 메스머가 ‘동물 자기술’ 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오늘날 최면을 뜻하는 ‘메스메리즘;mesmerism’ 이라는 말도 그의 이론과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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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퓌세귀르

메스머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 후작 퓌세귀르(Puysegur;1751-1825)는 오늘날의 최면법에 가까운 유도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는 우주 유체는 자력이 아니라 ‘전기’이며 이 전기 유체는 동물뿐 아니라 식물 등 모든 생명체에서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전기유체’ 를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동안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환자들 중 일부가 몽유병 증상을 보이며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의식이 있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일어선다, 걷는다’ 라고 암시하면 잠을 자는 상태에서도 일어서는가 하면 걷기도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바로「자기 수면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최면의 전성기

  • 파리아 ․ 클로케 ․ 오뎃

포르투갈의 사제 파리아(Abbe Faria;1756?~1819)는 퓌세귀르에게 최면을 배웠다. 파리아는 또 언어 암시만으로 트랜스 상태로 유도하여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통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도 밝혀냈는데 아마 근대 최면의 역사에 있어 암시만으로 최면 상태로 유도하여 치료를 행한 것은 파리아가 최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1829년 의과 외사인 클로케(Jules Cloquet)는 메스메리즘 하에서 유방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였으며 1836년 오뎃(Jean Victor Oudet)은 처음으로 메스메리즘을 이용하여 무통 발치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엘리엇슨 ․ 에스데일

1840~50년대에는 영국에도 메스메리즘이 상륙했다. 영국의 저명한 의사이자 런던 대학 병원의 교수인 엘리엇슨(John Elliotson;1791-1868)은 1837년에 최면 실험을 시작한 이래로 환자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그 기술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는 최면 마취만으로 1800여건이 넘는 외과적 수술을 통증 없이 시술하였으며 암시를 통한 신경성 질환의 치료도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에 엘리엇슨의 제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외과의 제임스 에스데일(James Esdaile;1808-1859)은 인도에 머무르면서 ‘자기적 수면;magnetic sleep’ 이라고 이름 붙인 최면 수술을 함으로써 최면이 보다 과학적 인정을 받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행한 무통 수술은 작은 수술만으로도 1,000여회, 대수술은 300여회 정도 이다. 그 중에는 손발 절단 수술, 거대한 종양 적출 수술, 무통 분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후 마취제의 발명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 제임스 브레이드

1842년 영국 맨체스터의 외과의사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1795-1860)는 굳이 동물 자기 등을 사용하지 않아도 빛나는 물체를 응시하면 최면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현재 최면의 유도법으로서 매우 대중적이고 유명한 방법인 ‘응시법’ 의 시초이다.
그는 ‘신경성 수면’이라는 학설을 도입하여 ‘메스메리즘’이란 말 대신 ‘최면학(neurypnology)’ 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는 ‘신경최면학(neure hypnology)’을 줄인말로 신경성(neuro) 이라는 단어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잠의신’ 이란 뜻을 가진 히프노스(hypnos) 라는 단어를 조합한 단어였다, 그러나 곧 이 용어의 앞머리에 있는 ‘신경’은 삭제되었고 히프노티즘(hypnotism)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최면(hypnosis)’ 이라는 용어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수면 학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hypnosis 라는 명칭을 바꾸려 했지만 무산되고 결국 오늘날까지 그대로 불리게 되었다.

최면의 과학시대

  • 낭시 학파 : 리에보 ․ 베르네임

이 시기에 세계 도처에서는 최면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며 잇따라 새로운 이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의 개업 의사 리에보(Ambrose Auguste Liebeault;1823~1904)는 환자들을 ‘최면성 트랜스’ 상태로 유도한 후「직접 암시」를 줌으로써 치료하는 혁명적인 테크닉을 개발했다. 그는 최면 유도에 있어 환자의 기대감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던 중 리에보가 최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티푸스(독;Typhus)의 연구 등으로 유명한 낭시의과대학의 베르네임(Hippolyte Marie Bernheim;1840~1919)교수가 리에보라는 시골 의사를 내방했던 것이다. 베르네임 교수는 자신에게 치료를 받던 극심한 증상의 좌골 신경통 환자가 전혀 호전되지 않자 리에보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리에보는 직접 암시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료하게 된다. 베르네임은 환자가 치료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어 리에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20여 년을 함께 최면요법을 이용해 85%의 경이로운 성공률을 보이며 3만 여명의 환자를 치료해 내게 되었고 성공 사례를 모아 ‘암시치료’ 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 유럽 전역에서 의사들이 최면요법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후 리에보와 베르네임의 제자들을 ‘낭시 학파’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낭시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로써 최면이 더 이상 기괴한 것이 아닌 과학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다.

  • 살페트리에르 학파 : 샤르코

낭시 학파와 쌍벽을 이룬 또 하나의 최면 연구 학파가 있는데,「살페트리에르 학파」로,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당대 최고의 신경학자 샤르코(Jean Martin Charcot;1825-1893)가 그 중심인물이다. 그는 낭시 학파에 대치하는 강력한 학파를 형성해 갔다. 샤르코는 최면의 각 단계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는데 첫째는 강경증, 둘째는 기면(일종의 무기력상태)상태, 셋째는 몽유상태라고 하였다. 또 최면을 전환 히스테리아(hysteria) 와 유사한 ‘인위적신경증’ 이라고 보았다.
이런 샤르코의 견해는 그가 쓴 평론이 188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면서 메스머 이래 100여 년 동안 오로지 자기 요법(최면요법)을 계속 부정해 온 일반인과 의학계 그리고 과학계가 마침내 이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도 1889년 파리에서 개최된 최면치료와 최면실험에 관한 제1회 국제회의에서 ‘최면은 암시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 이며, 암시와 최면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국가기관에서 확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면의 현대적 인식

  • 프로이트와 브로이어

1893년 브로이어(Josef Breuer;1842~1925)와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가 ‘히스테리아에 관한 연구’ 를 저술해 카타르시스법과 그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정신의학에서 심리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된 최초의 저서가 되었으며 후에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와 리에보, 베르네임에게도 최면에 대해 배운 후 브로이어와 함께 이야기 요법이 어떻게 환자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수립했다.
최면 상태에서의 환자가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털어놓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감정이 경감되어 정서적 해소 현상이 일어남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리요법(카타르시스;catharsis)이라고 불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무의식」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암시가 아닌 방법에 의한 최초의 최면 치료가 되었는데 이로써 ‘최면분석;hypno analysis’ 이 성립되었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저항 등으로 최면 상태로 유도할 수 없었던 환자들을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이라는 기법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는데 가벼운 수면 단계에서 활용되는 자유연상의 치료 방법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이란 학문을 완성해 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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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블로프

‘조건반사’로 유명한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1849~1936) 는 최면을 계속 사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면의 정의를 ‘본래의 수면은 대뇌 피질의 대부분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제지한 상태이며, 최면은 대뇌 피질의 일부분이 활동을 정지한 부분적 수면이다’ 라고 하였다.

최면의 부흥기

  • 제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많은 전쟁 신경증 환자가 속출하면서 이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최면요법’ 이 적합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환자들은 급격히 늘어나는 반면, 정신분석법과 같이 오랜 기간이 걸리는 치료 방법의 한계로 인해 신속한 치료 효과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많은 병사들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작은 참호에 몸을 감추며 공포에 떨면서 싸우던 장면들이 밤이면 밤마다 꿈에 나타나 시달림을 당했다고 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 신경증의 치료에 한층 더 최면요법의 가치가 인정되어 많은 의학자들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를 겪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최면을 멀리하고 정신분석을 창시한 이래 최면은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 헐 및 힐가드

미국의 심리학자인 헐(Clark Hull : 1884~1952)은 최면 실험을 통해 최면 상태의 피최면자와 각성 상태의 사람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최면 상태에서는 최면자의 암시를 잘 받아들이게 되는 피암시성이 고도로 항진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최면과 피암시성’ 이라는 책을 펴냄으로써 이후 최면이 보다 표준화되고 객관적인 실험 절차에 따라 연구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1949년 미국의 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힐가드(Ernest R. Hilgard;1904~2001)는 심리학계의 주류에 위치하면서 많은 면에서 미국의 학문적 최면연구의 기초를 구축했다. 그는 스탠포드대학에 최면연구실을 설립해 최면현상 및 최면감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했고 그때까지 학술연구에 도외시되었던 최면연구를 미국심리학계의 메인 스트림의 일각에 평가하게 했다.
그는 같은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던 부인 조세핀(Jose Phine Hilgard)과도 최면을 연구하면서 관련논문과 다수의 저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젊은 동료 안드레․바이젠호파와 공동으로 최면 감수성 테스트의 금자탑으로 여겨지는 일련의「스탠포드 척도」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 에릭슨

헐의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밀턴 에릭슨(Milton Hyland Erickson;1901-1980)은 ‘현대 최면 요법의 아버지’라 불린다. 에릭슨의 업적을 최면에만 한정해 보자면 크게 다음의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방대한 최면 실험을 실시하여 실증적, 과학적인 지견을 축적했다. 최면에 관련한 수많은 미신과 오해를 불식시킨 연구자로써의 실적을 꼽을 수 있다. 둘째, 간접 최면법, 손가락 등을 이용한 관념운동의 원리 등 다양한 최면 유도 기법을 개발하여 피최면자의 적응 범위를 대폭 넓힌 임상가로써의 실적이다. 셋째, 심리요법에 있어서의 최면의 이용에 대하여 발본 적으로 개혁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리차드밴들러(Richard Bandler)와 존그라인더(John Grinder)의 NLP 체계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에릭슨은 1957년 미국 임상 최면 학회(The American Society of Clinic Hypnosis ; ASCH)의 창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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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의 급속한 발전

오늘날 최면의 추세를 보면 1950년대부터 최면은 몇 가지 커다란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영국,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의학 단체 등에 의하여 정식으로 최면은 가치 있는 수단으로 인정 된 것이다. 1949년에 설립된 임상 및 실험최면학회(SCEH)가 되었으며 1955년 4월 23일 영국 의학 협회 British Medical Association (BMA)는 장기에 걸친 조사 검토 끝에 최면은 많은 유용성이 있으며 의료 상 지극히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최면과 암시 기법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했다.
1958년에는 미국 의학 협회 American Medical Association(AMA)가 최면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치료 수단으로 인정하였다. 같은 해에 미국 치과 협회(American Dental Association)는 치의학 분야에서의 치료 수단으로 최면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미국 의학회와 함께 의학 및 치의학 전공 학생들이 최면 교육을 받도록 권고하는 정책을 두기도 하였다. 1961년에는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도 최면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치료의 방법으로 공인하였다. 이미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펜실베이니아, 콜롬비아 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 최면 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1969년 미국 심리 학회는 최면에 관심이 있는 심리학자를 중심으로 심리 최면분과를 신설해 놓았다. 그리고 근년 미국 종합병원이 신설한 통증처리실 에서는 최면을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에는 최면 전문 클리닉 센터가 건립되어 환자들이 최면 치료를 손쉽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국내도입

최면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과 미국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최면사들은 대부분 거의 일본에서 또는 일본 서적을 통해 최면을 배우거나 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최면의 발자취를 보면 1923년 일본에 본부를 둔 “동경정신연구회 조선지부(東京精神硏究會朝鮮支部)”에서 “실지응용최면술독습(實地應用催眠術獨習 :著者 林弘基)” 이라는 최면강의록을 통해 최면을 보급해 왔다. 이후1960년 정신과의사인 이만용씨가「최면술 입문」을 펴낸 것을 필두로 김용락씨가 트레이시 박사의「최면의 신비」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최면이 눈속임의 마술이 아닌 인간에게 유용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최면도입이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의한 어려움과 전후 경제재건과정에서 물질적 가치 추구에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늦게 인식된 면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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